안녕하세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빠져버린 작가 수정입니다 ~.~
어제는 헬스장 아르바이트 full 근무였어요.
저녁 시간까지 있으려면 무언가 시간을 떼울거리가 필요했지요.
그 수단으로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라는 소설책을 준비해왔어요.
그러나... 책읽기는 알바시간에만 한정되지 않았어요.
결국 집에 와서도 <악의>를 완독하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ㅋ
최근에 읽었던 <라플라스의 마녀>는 두껍기 때문에
2~3일에 걸쳐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악의>는 한손에 쥐어지는 두께라 하루만에 독파할 수 있었지요+_+
그럼,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평 짧게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읽고 참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더라구요.
저에게는 꽤나 '찝찝한' 여운이 오래 가는 책인 것 같습니다.
왜 '찝찝한'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명확하고 명료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들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독자인 저의 기분이라든지, 노노구치의 살해동기라든지
물론, 살해동기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지요.
표면적으로 알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할 때'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싫어할 때 명확한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싫어할 때는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냥' 싫어하기도 합니다.
이런 복잡한 심리가 <악의>라는 책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책을 다 읽었을 때, 독자들은 여러모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권선징악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낸 말 같다고요.
사실상 권선징악이라는 것은 없다고.
사람들은 착하고,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고, 순수하고, 배려심있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깎아 내리려 들기 바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의 심연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의 좌절된 모습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그런 사람들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 같더군요.
그 사람들이 버티면 버틸수록
그만큼 더 모질게 대하죠.
그러다 결국 한계를 맞이하면
'거봐 너도 그럴 줄 알았어. 너도 똑같으면서 아닌척은.'
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은 그저, 본인이 <착하고,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고, 순수하고, 배려심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합리화하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비슷한 의미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도 그렇구요.
<악의>에서는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왜' 그랬냐에 대해 가해자는
'그냥.. 그냥 싫어요. 몰라요. 그냥 싫어요.' 라는 식의 대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학교폭력,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었어요.
마찬가지로 노노구치가 히다카를 살해한 것에도 '명확한' 이유가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명확한' 이유가 없는 괴롭힘에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악의'는 없었다는 거죠.
그들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괴롭힌 게 아닙니다.
'그냥' 괴롭힌 거예요.
왜? '그냥' 싫으니까.
그 '그냥'의 기저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바로 제가 앞서 말한
사람들은 착하고,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고, 순수하고, 배려심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히다카가 그런 아이였죠.
하지만 그렇게 억세게 굴수록 더욱 괴롭힘을 당합니다.
어떤 학생이 따돌림을 당하거나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어떤 경우이든 '소문'과 '편견'이 따라다니기 마련이죠.
이 점 또한, '악의'라는 책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혼란스럽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건지 헷갈리고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이에 대한 소문과 가쉽, 편견, 선입견도
누군가를 싫어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는 것처럼요.
노노구치의 엄마가 그 동네에 대해 험담했듯이.
이처럼 <악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어이없기도 해요.
학창시절에 괴롭힘과 범죄를 저지른 후지오가
새로운 꿈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시도를 한 것도ㅎ
그리고 그런 후지오의 과거 행적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 대해
명예훼손이라며 후지오의 여동생이 책을 전면회수하고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ㅎ
요즘의 사회 문제와 동떨어지지 않아서 씁쓸했습니다.
과연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해줘야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잊지 못할 상처와 피해를 줘놓고,
그런 가해자(후지오)도 '꿈'을 실현해보겠다고 기대감을 품는 것도,
가해자(후지오)가 한 범죄가 맞음에도, 가해자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둥
가해자를 보호해달라는 가족의 주장도 이기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작품인 <방황하는 칼날>에서도
범죄를 지은 학생이 살ㅎㅐ당하자, 자신들 아들이 피해자라고 울부짖는 부모를 보며..
인간의 이기심과 바닥은 어디까지인가를 되뇌여보게 되더군요..
누군가를 싫어할 수도 있죠.
그리고 이유없이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싫어하는 것과
그걸 밖으로 '악의 없이' 상대방에게 행동으로 표출하는 건
엄연하게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악의 없이 행동으로 표출 하더라도' 그게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후지오 일당들이 학교 폭ㄹㅕㄱ을 저질렀을 때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고,
피해자도 보복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장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학포ㄱ은 항상 문제가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도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디지털 문명의 발달으로 더욱 지능적으로, 악랄하게 심해지고 있죠..
촉법소년을 폐지해야 된다는 주장에 전 동의합니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도 '죄를 지었는데 애 어른이 어딨어..'라는 대사가 있죠.
죄는 죄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집단따돌림은 사라지지 않았죠.
결국 미래에도 '악의 없는' 괴롭힘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말이죠.
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어떤 괴롭힘을 가한 사람은, '똑같은' 방식으로 그 고통을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어떠한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가둬두지만 말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 죄목을 당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보다 더욱 강한 사람에게 말이죠.
본인이 그렇게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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